.


회원 언론기고 및 출판





<조선일보> 정태익 / 톨스토이, 이토 히로부미는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었다 며 질타

페이지 정보

작성일2014-12-08 11:06 조회4,255회 댓글0건

본문

 



정태익 전 청와대외교수석의 외교비사


톨스토이, "이토 히로부미는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었다"며 질타

  

[프리미엄조선] 입력 : 2014.11.06 13:27 | 수정 : 2014.11.06 13:49

러시아는 대문호의 나라다. 톨스토이,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투르게네프, 고리키, 마야콥스키,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세계적 문호들이 모두 러시아에서 배출되었다. 실제로 러시아문학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세계문학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러시아문학은 한국 근대문학 초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였다.

필자가 주러시아 대사로 부임한 시기는 2002년 3월이었다. 당시 필자는 스스로 던졌던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첫째, 어떻게 하면 러시아에 대한민국을 잘 알릴 수 있을까? 둘째, 어떻게 하면 러시아 국민과 가까이 지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고심한 끝에 필자는 문화적 접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침 2003년 6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한국문학제가 열렸다. 러시아의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와 한국의 대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 행사는 반세기가 넘도록 단절되어온 한국과 러시아의 문학교류를 정상화하고 본격적인 문화교류의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톨스토이 연구 김려춘 교수를 만나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아시아ㆍ아프리카문학부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던 김려춘 교수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북한의 소련 유학 1세대인 김 교수는 1946년 함흥사범학교 재학 중 소련에 유학을 왔다가 귀국 후에 평양외국어대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 모스크바대학의 대학원에 다시 입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졸업 후에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망명을 신청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러시아 문학계에서 활동해온 그는 오랫동안 숙성된 러시아 실력을 발휘하여 김소월 시집을 출간하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

러시아 문호 중에서도 톨스토이는 동방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작품 속에 담았다. 그의 작품이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널리 읽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지난 100년 동안 동양의 지식인을 지속적으로 열광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삶에서 근원적 과제의 해결에 관한 그의 세계적 이념은 오늘날에도 매우 시사적이다. 톨스토이의 세계적 명성은 결과적으로 동양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지닌 동양과의 관련성은 다면적이고, 아시아 나라들의 예술문화와 사회사상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톨스토이, “이토는 미치광이”이자 “타락한 무도의 인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서 톨스토이 특별전이 2004년 12월 10일부터 2005년 6월 27일까지 열렸다. ‘살아있는 톨스토이를 만나다’가 전시회의 테마였다. 이 전시회는 톨스토이 한국 애호가들에게 톨스토이 생애의 체취를 생생하게 느낄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톨스토이가 생전에 직접 작성했던 원고와 서한, 소장, 그림, 조각 등 귀중한 유품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울림을 주는 인류의 문화재였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톨스토이에 관한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아시아ㆍ아프리카문학부 수석연구원인 김려춘 교수가 ‘톨스토이와 동양’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김려춘 교수는 이 자리에서 톨스토이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에 대하여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라고 언급한 사실과 톨스토이가 한국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다. 톨스토이의 이토에 대한 평가와 톨스토이가 한국인을 만났다는 사실의 발굴과 공포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흥분되는 희소식이었다.

필자는 김려춘 교수의 발표 내용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인 김학준 박사에게 알렸다. 김 박사는 구한말 외국인이 조선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나 평가를 모아 발간한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조선 이라는 책에 이 내용을 실었다.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는 서구 열강이 동양을 침략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으며, 근대화에서 한창 앞선 일본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한국을 침탈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문명의 보급’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진 일본의 한국 강탈행위는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 이토 히로부미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하여 당시 서구 열강은 ‘일류 정치가’라 칭하며 그의 정치, 외교 수단이 탁월하다고 찬양하고 있었다. 심지어 러시아의 잡지 역사통보 는 그를 ‘일본의 비스마르크’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하여 톨스토이는 당대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준열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한국의 지배자 이토는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오”

김려춘 박사는 톨스토이 일가의 가정의였으며 문호의 곁에서 살며 그의 언행을 매일 기록한 슬로바키아 출신인 D. 마코 비츠키의 4권짜리 야스나야폴랴나 일기 를 모두 뒤져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냈다.

1906년 7월 24일 저녁 무렵이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에 레프 니콜라예비치(톨스토이의 이름)는 무사도 라는 책을 들고 오셨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도덕 법전이자, 중세 유럽 기사들의 목가와 비슷하지.”
톨스토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사고가 없소. 있는 것은 다만 응용과학의 재능이오. 그들의 천황은 깊이는 없으면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지. 한국의 지배자 이토는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오.” (마코 비츠키의 야스나야폴랴나 일기 제2권 185쪽)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톨스토이의 발언은 계속 되었다.

“핀란드, 인도, 폴란드, 한국을 러시아, 영국, 프러시아, 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들에 병합시키기 위해 사납게 날뛰는 정치가들은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미치광이다.” ( 톨스토이전집 제37권 201쪽)

러일전쟁에서 주동적 역할을 했고, 1906년 2월부터 초대 조선통감으로 한국을 통치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톨스토이는 “미치광이”이자 “타락한 무도의 인간”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문화 보급의 미명 아래 한국을 빼앗고 식민지 착취를 행한 침략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했다. 한국의 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세계에 고하기 위해서 안 의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이토는 한국의 혼을 이해하지 못한 채 또한 톨스토이가 자신에 대해 내린 준엄한 평가를 듣지 못한 채 생애를 마감했다.

톨스토이는 중국학자 구훈민이 보내온 도덕적 입장에서 본 러일전쟁 발생의 원인 이라는 저서의 여백에 “한국인은 동양적 의미에서 볼 때 대단히 문명한 국민”이라고 쓰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동양 문화의 항구적 가치를 인식하고 서양 중심적 입장을 거부했다. 따라서 ‘서양화’에서 ‘우등생’이었던 일본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동양에는 고유한 문화가 있으니 서양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탈아’가 아니라 ‘동양으로 돌아가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적’ 한국은 그의 정신세계에 가까웠고 한국문화를 많이 알고 싶어 했다.(김려춘의 톨스토이와 동양 185쪽)

톨스토이는 ‘동양적 의미에서 볼 때 대단히 문명화된 한국’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동양은 서양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 죽기 6개월 전에 만난 한국인 있다

김려춘 박사는 1910년 5월 30일자 마코 비츠키의 야스나야폴랴나 일기 에서 또 다른 기록을 찾아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는 말을 타고 투르베츠코이 댁을 향하여 떠났다. 아침에 한국인이 톨스토이를 방문했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아쉽게도 이것이 기록의 전부였다. 톨스토이를 방문한 한국인의 이름은 물론이고 성도 밝히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에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만난 한국인은 과연 누구일까?

말년의 톨스토이가 사는 야스나야폴랴나는 세계 지식인들이 동경하는 성지였다. 삶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지식인이 문호와 편지로 왕래하거나 야스나야폴랴나로 직접 찾아왔다. 톨스토이 박물관에는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편지가 약 5만 통이나 보관되어 있다. 김려춘 박사는 한국에서 보내온 편지가 있는지를 조사해 달라고 톨스토이 박물관에 의뢰했다. 회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를 방문한 한국인의 이름을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톨스토이가 한국인을 만났다는 사실은 확인된 셈이다.

지금까지 톨스토이 생존 시 교류한 세계 각국의 지성인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한국인은 없었다.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 위기에 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톨스토이와 여유를 가지고 교류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직접 만난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으로 반갑고 다행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톨스토이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남선이 종합잡지 소년 을 편집, 발간한 1908년부터였다. 최남선은 와세다 유학 시절 톨스토이로부터 인격의 감화를 받았다. 톨스토이는 중국의 노자를 알게 된 이후 그 철학적 깊이에 감탄하여 항상 도덕경 을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도 바로 그러했다고 한다. 1909년 최남선은 소년 제2권과 제6권)에 ‘현시대 대도사 톨스토이 선생의 교시’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서울대학교 최종고 교수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춘원’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톨스토이와 춘원의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춘원에게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였다. 춘원은 일본에서 기독교 교육을 통해 톨스토이를 숭앙하게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던 해에 톨스토이가 서거하여 비통한 심정으로 추모회를 개최하였다. 춘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톨스토이 정신을 따라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토로하고 있다.

‘숨어 사는 백성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이 스스로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문학 특히 톨스토이와의 만남은 엄청난 울림으로 한국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05/2014110502685.html


Warning: Use of undefined constant php - assumed 'php' (this will throw an Error in a future version of PHP) in /home1/page87/public_html/kcfr20/skin/board/basic_book/view.skin.php on line 18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47건 5 페이지
회원 언론기고 및 출판 목록
번호 제목
327 <경향신문> 정기종 / 한국은 ‘홀로서기’를 할 준비가…
일자: 06-04 | 조회: 1012
2018-06-04
1012
326 <통일한국> 손선홍 / 통일과정의 논쟁점에 대비하고 있…
일자: 06-04 | 조회: 813
2018-06-04
813
325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Three threats t…
일자: 06-04 | 조회: 990
2018-06-04
990
324 <서울신문> 이병국 / 엉터리 계획서 쓴 ‘콜럼버스 공…
일자: 06-04 | 조회: 938
2018-06-04
938
323 <매일경제> 손선홍 / 콜 前총리가 `獨통일의 아버지`…
일자: 06-04 | 조회: 815
2018-06-04
815
322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North Korea and…
일자: 06-04 | 조회: 867
2018-06-04
867
321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South Korea-US …
일자: 06-04 | 조회: 809
2018-06-04
809
320 <조이문학> 이경구 / 북소리...
일자: 06-04 | 조회: 956
2018-06-04
956
319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The two Koreas …
일자: 06-04 | 조회: 739
2018-06-04
739
318 <세계일보> 한태규 / 세계초대석 인터뷰
일자: 05-30 | 조회: 1314
2018-05-30
1314
317 <매일경제> 손선홍 /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일자: 05-30 | 조회: 842
2018-05-30
842
316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Korea’s nationa…
일자: 05-30 | 조회: 1038
2018-05-30
1038
315 <코리아헤럴드> 박상식 / How to deal wit…
일자: 05-30 | 조회: 1229
2018-05-30
1229
314 <대전일보> 김현중 / 한류 위기 ... 제2의 싸이가…
일자: 05-30 | 조회: 1394
2018-05-30
1394
313 <통일신문> 정태익 / 안보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일자: 10-19 | 조회: 1484
2016-10-19
1484
312 <문화일보> 송종환 /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기…
일자: 11-09 | 조회: 2413
2015-11-09
2413
열람중 <조선일보> 정태익 / 톨스토이, 이토 히로…
일자: 12-08 | 조회: 4256
2014-12-08
4256
310 <조선일보> 정태익 / 사라진 헤이그 밀사의 후…
일자: 12-08 | 조회: 3660
2014-12-08
3660
309 <중앙일보> 송민순 / 전시작전권 전환은 통일과…
일자: 11-13 | 조회: 2957
2014-11-13
2957
308 <mk 뉴스> 임홍재 / 저탄소 지구를 향한 유…
일자: 09-23 | 조회: 2089
2014-09-23
2089
307 <조선일보> 정태익 / 사라진 헤이그 밀사 후손…
일자: 08-18 | 조회: 4017
2014-08-18
4017
306 <조선일보> 정태익 / 고르바초프 라이사를 잃…
일자: 05-20 | 조회: 4164
2014-05-20
4164
305 <조선일보> 정태익 / 장쩌민, 來而不往 非…
일자: 04-10 | 조회: 4030
2014-04-10
4030
304 <조선일보> 정태익 / 텍사스 출신 부시, …
일자: 03-03 | 조회: 3398
2014-03-03
3398
303 <조선일보> 정태익 / 청와대 출근 첫날 자정 …
일자: 03-03 | 조회: 3443
2014-03-03
3443
302 <조선일보> 정태익 / 유성환의원 발언으로 미국…
일자: 12-30 | 조회: 3788
2013-12-30
3788
301 <조선일보> 정태익 / 1994년 가을 대사관저…
일자: 11-27 | 조회: 1375
2013-11-27
1375
300 <조선일보> 정태익 / 한국-이집트 극적인 수교…
일자: 11-27 | 조회: 1428
2013-11-27
1428
299 <광화문 포럼> 정태익 / 한반도 정세의 대전환…
일자: 11-27 | 조회: 1500
2013-11-27
1500
298 <한국?파키스탄 친선협회> 오재희 / 한국?파키…
일자: 11-22 | 조회: 1899
2013-11-22
1899
게시물 검색







한국외교협회 | 개인정보 보호관리자: 박경훈
E-mail: kcfr@hanmail.net

주소: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94길 33
TEL: 02-2186-3600 | FAX: 02-585-6204

Copyright(c) 한국외교협회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1004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