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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태익 / 고르바초프 라이사를 잃는 것이 러시아를 잃는 것보다 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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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4-05-20 11:20 조회4,0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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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익 전 청와대외교수석의 외교비사


고르바초프 "라이사를 잃는 것이 러시아를 잃는 것보다 더 슬펐다"

  

[조선일보] 일시 : 2014.05.20 05:37 


필자는 주러시아 대사 임명을 받은 뒤 2002년 3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부임 첫 주말이었다. 태석원 정무공사가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 대부분이 묻혀 있는 노보데비치(Novodevitchy) 공동묘지를 참배하는 일정을 주선해주었다. 필자는 러시아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을 대면하는 것이 러시아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다.

과연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공동묘지에는 러시아 정치·경제·문화·예술·스포츠 등 모든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총망라되어 묻혀 있었다. 유엔에서 신발을 두들기며 기세등등하게 연설하던 소련 개혁의 선구자인 흐루쇼프 서기장, 우리 기억에 생생한 그로미코, 몰로토프, 미코얀 외상, 안톤 체호프, 투르게네프 등 저명 문인, 무소르그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저명 음악가,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고르바초프 서기장 부인 라이사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사들과 필자는 묵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묘지에는 다양하고 개성 있는 조각들이 설치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라이사 여사의 묘지에는 실물 크기로 처녀 때의 모습이 조각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고르바초프, “라이사를 잃은 것이 러시아를 잃은 것보다 더 슬프다”

수도원 방문으로 첫 주말을 보낸 필자는 곧이어 러시아 정부, 의회, 종교, 언론, 외교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주요 인사에 대한 예방을 시작하였다. 대사 부임 인사의 목적으로 만난 저명한 인사 중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있었다. 고르바초프재단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찾아갔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 뒷면에 걸려 있는 라이사 여사의 초대형 초상화가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라이사 여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부임하여 제일 먼저 찾아뵌 분이 라이사 여사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고 우아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평화롭게 계시면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감격에 찬 눈빛으로 초상화에 눈길을 주면서 “우리 가족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례하였다. “라이사를 잃은 것이 러시아를 잃은 것보다 더 슬프다”는 세기적 사랑 고백을 남긴 고르바초프다운 반응이었다. 면담 내내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2001년 3월 크렘린궁에서 신임장을 제정한 후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필자.

▲2004년 10월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관저에 초청하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페레스트로이카, 독일 통일, 한소 수교 등 세계사적 변환을 가져온 역사적 인물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2001년 11월 노르웨이에서 개최된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모임에 김대중 대통령 수행원 자격으로 갔던 필자는 당시 아주 가까이서 고르바초프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필자는 그 사실을 언급하며 “우리는 구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 대통령의 안부를 전한 다음 “한러 수교 때 결정적 도움을 준 데 대하여 감사드리며 앞으로 한러관계 발전을 위하여 계속 관심과 지원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슬쩍 던져 보았다.
“한반도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한반도에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바랍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안부 인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한반도에는 이미 나보다 훌륭한 김 대통령이 계시므로 한반도 문제가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미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고 남북한 협력의 틀도 마련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단계라고 저는 봅니다.”

이때까지만 하도 북한의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대화 진전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원래 예정된 면담 시간은 15분이었다. 그런데 라이사 여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필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대통령께서 서방 기자에게 러시아와 유럽의 협력 문제에 관해 언급하면서 러시아와 유럽이 공유할 수 있는 러시아 유럽 ‘공동의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언급을 하셨더군요. 러시아는 유라시아 국가인 만큼 아시아 국가들과 지을 ‘공동의 집’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여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요?”

고르바초프, 톨스토이 말 인용 “동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변하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동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아시아와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럽에는 국가 규모가 비슷한 나라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공동의 집’을 짓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는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너무 커서 당분간 ‘공동의 집’을 짓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2001년 3월 크렘린궁에서 신임장을 제정한 후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필자.

▲2001년 3월 크렘린궁에서 신임장을 제정한 후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필자.

필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매우 순발력이 넘치고 기지가 풍부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의 해명 자체가 여러 가지 뉘앙스를 풍겼다. 그는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가 러시아와 아시아의 관계보다 깊다’는 것과 ‘아시아는 강대국이 많아서 이해관계 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배경은 트럭기사였다?

‘타임’이 ‘세기의 인물(man of century)’로 선정할 만큼 세계 구도를 바꾸어 놓은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필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도 나누었다.
“대통령께서 소련의 개방(Glasnost)과 개혁(Perestroika) 정책을 추진한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모스크바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고향인 코카서스 지방의 조직 책임자가 되어 집단농장 업무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농산물 생산품을 운반하는 트럭 기사가 자신이 싣고 가는 화물이 적재함에서 흘러내리는데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트럭 기사는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임무만 수행하면 정해진 급료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화물 적재 여부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운반 과정에서 소실되는 양이 상당했겠군요?”
“전체 농업생산물 수확량의 약 30%에 해당한다는 통계까지 나와 있었지요. 그것을 보고 나는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 반드시 개혁을 통하여 이런 적폐를 시정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 의지의 뿌리가 오래 숙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공산체제가 보다 효율적으로 서방과 경쟁할 수 있도록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소련의 해체로 나타났다. 실패한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 국내에서의 인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서방에서 시장경제의 확대와 세계화와 자유화를 가져온 세기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의도와 결과가 너무도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9/20140519033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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