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정해문 / 미·중 관세전쟁, 갈림길에 선 아세안과 한국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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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54회 작성일2025-06-17 15:31:45본문
자유무역 흔들리며 글로벌 무역질서 재편 소용돌이 … 양자간 전략적 연대와 통상 균형이 필요한 시점
자유무역은 무역을 확대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며 후생을 증진시켜 번영을 가져다준다. 국제무역 이론의 창시자이자 자유무역의 아버지로 불리는 19세기 초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그 유명한 비교우위론을 이론적 근거로 삼아 자유무역을 주창하였다.
그의 비교우위론은 자유무역이 교역 당사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근원을 규명함으로써, 무역을 하지 않을 때보다 무역을 할 때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였다. 비교우위론의 핵심은 양국이 교역을 진행함에 있어, 각자 상대적으로 생산 비용이 낮은 재화에 특화할 경우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기반한 자유무역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출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와 이를 계승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국제무역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무역은 양 교역국을 모두 더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자유무역의 혜택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인류를 빈곤에서 해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해온 자유무역이 지금 역사의 변곡점을 마주하고 있다.
미·중 관세 협상의 동남아에 대한 함의
악화일로를 달리던 미·중 무역전쟁에 급브레이크를 건 5.12 제네바 고위급 관세 전쟁 휴전 합의가 동남아 국가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워싱턴과의 관세 인하 협상에 명운을 걸고 있다. 미·중 두 글로벌 강대국 간 90일 임시 거래 성사 이후 아세안 회원국들은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부과한 초고율의 상호관세를 원상 복구시킬 수도 있는 7.8 시한을 앞두고 시계추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가혹한 관세 응징을 당한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중국보다 더 높은 관세율에 직면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서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중국보다 더 높은 관세는 동남아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아세안 국가들의 경쟁력과 투자 매력이 훼손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달 제네바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은 중국 수입품에 대해 관세율을 이전의 145%에서 30%로 인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상응하여 중국은 미국 상품에 부과한 125%의 보복관세를 일반 수준인 10%로 낮추기로 했다.
미·중은 6.9~10일 간 런던에서 고위급 무역협상을 재개해 5.12 제네바 잠정 합의의 후속 논의를 이어갔으며, 이번 런던 협상 직전까지도 양국 간 무역 긴장을 고조시킨 중국의 대미 희토류 수출 통제와 미국의 대중 반도체 기술 수출 통제 등 비관세 장벽은 물론, 중국 유학생의 미국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큰 틀(프레임워크)에 합의하였다. 세계 1·2위 경제대국 간 무역 긴장이 해소되고 순풍이 불지 여부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기로에 선 동남아 제조업
미국의 급격한 고율 상호관세는 아세안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있다. 캄보디아 49%, 라오스 48%, 베트남 46%, 미얀마 44%, 태국 36%, 인도네시아 32%,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각 24%, 필리핀 17%, 싱가포르 10%의 상호관세가 동남아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상호관세 인하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만약 7월 8일 전에 미·아세안 간 거래가 성사되지 못한다면, 아세안 제품에 대한 관세는 중국산 상품에 부과된 관세를 능가할 수 있다.
미·중 타협은 아세안이 분명하고 포괄적인 전략을 갖춰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8월 12일 이후 중국이 동남아 국가들보다 더 낮은 미국 관세율로 협상을 타결한다면, 중국에 대한 투자 및 제조업 대안으로서의 동남아 국가들의 상대적 매력은 줄어들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은 특히 우려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이들 국가는 미·중 무역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생산공장을 자국으로 재배치한 중국 기업들로부터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더 낮은 관세율이 적용된다면 이러한 중국 기업들의 동남아 이전 인센티브가 줄어들고, 공급망 다변화와 연계된 아세안 국가들로의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이 둔화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투자가 중국으로 다시 유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과 아세안 국가들 간 양자 협상 결과는 동남아 국가들이 그들의 경쟁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변화된 글로벌 무역 구도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위험에 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중국 상품의 대미 우회 수출 논란
동남아 국가들, 특히 베트남을 통한 중국 상품의 대미 우회 수출 문제가 뜨거운 통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동남아 지역이 대미 관세 협상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중국 상품의 행선지 변경을 단속하라는 압력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무역 전문가들은 ‘환적’으로 알려진 이러한 관행이 대미 협상에서 중대한 이슈가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동남아시아는 원산지 세탁 문제로 인해 여타 지역보다 더 큰 압력에 처해 있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 시장에 계속 수출하기 위해 동남아 지역을 ‘뒷문’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입장에서 원산지 규정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 제조업자들을 도와 징벌적 관세를 회피하게 하고 있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 수출품의 환적을 허용하는 주요 국가로 미국 당국에 의해 반복적으로 지목되어 왔다. 다수 기업들은 중국에서 생산된 부품을 동남아 제3국에서 조립하거나, 합법적인 원산지 변경 요건인 충분한 부가가치를 더하지 않은 채 라벨만 바꾸는 방식으로 수출한다. 이는 불법이며 추적이 어려운 관행이다. 베트남은 가장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
중국과 멕시코에 이어 미국의 3대 무역 흑자국인 베트남은 트럼프 1기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제조업 이전을 발판 삼아 제조 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 입장에서 미·베트남 무역 회담의 최우선 순위는 환적 문제로 보인다.
아세안-미국 정상회담 추진
아세안은 관세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총리는 지난 5.26 연례 아세안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올해 아세안-미국 정상회의 개최를 요청하는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밝혔다. 니케이 아시아는 정상회담 장소는 미정이지만 잠정 일정은 10월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안와르 총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아세안은 미국에 대해 보복 조치를 피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일부 회원국의 양자 협상과 병행해 미국의 관세에 대한 대응을 조율하기 위한 전담팀을 구성했다고 언급했다.
이번 미국의 관세 포화는 아세안이 비미국권 무역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다변화하고 새로운 파트너십을 추구하도록 자극하고 있으며,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 계기에 개최된 아세안-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와 아세안-GCC-중국 정상회의는 그러한 인식 전환의 구체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세안은 이미 브릭스(BRICS)와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 외연도 확장 중이다. 아세안은 또한 역내 경제통합을 더욱 심화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현재 아세안 역내 교역 비중은 전체 교역의 21.5%에 불과하며, 이는 유럽연합의 61.6%와 크게 대비된다.
불확실성 속 한·아세안 협력 적기
미국발 관세 전쟁의 피해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차별적 관세 정책이 우리 수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우리의 양대 수출시장인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은 각각 8% 이상 급감했다. 같은 달 대미 수출은 자동차 32%, 철강 21%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4일부터 수입산 철강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50%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지난해 기준 우리 철강 수출의 약 13.1%를 차지하는 최대 수출 시장이다. EU가 보복 관세를 예고하면서 국내 철강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과 EU의 통상 장벽이 동시에 강화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철강업계가 통상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마침 아세안이 이번 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를 계기로 무역 파트너 다변화와 역내 통합 심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로 한 만큼,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아세안과의 협력에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할 적기이다.
정해문 전 태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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