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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도장이나 새기기 쉬운 감자도장이나 가짜도장이란 마찬가지이다.(쓰시마 방문 보고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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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민 작성일13-04-04 07:43 조회1,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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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도장이나 감자도장이나 가짜이긴 마찬가지이다. (쓰시마 방문 제2)

 

1978 2월이었다. 이 때는 내가 주독대사관에 1등 서기관 겸 영사로서 부임하였을 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2등 서기관을 마치고 서울에 들러와, 군대도 늦깍이로 법이 바뀌어 마쳤고 구주 국과 통상 국에서 근무 후, 부임해 보니, OO 대사님께서 대사님으로 계셨고 이 대사님과 사모님께서는 행여나 현재 연세대 OO 대학원장으로 계셨던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시던 아들 이OO교수님이 혹시나 한국말을 잘 못 할까바, 새까막게 깨알로 한국말 편지를 미국의 아들한테 쓰시던 노력이 없었던들, 지금의 이OO교수께서 한국말을 그렇게 잘 하지는 못하였으리라. 그 때였다.

 

지금은 대 부분 은퇴하여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마는 그 당시 광부나 독일에 2년 후에 진출한 간호요원들은 광산이나 병원에서 온갖 굳은 일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광부나 간호요원들이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은 잘 몰랐으나, 추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독일 은행에 진 빚 3천만 불 정도의 지불보증을 이들은 금사라기 같은 월급에서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로 맨 꼴찌에 가까운 나라에 지불보증을 해 줄 어느 나라 은행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라. 그 만큼 우리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신용이 없었다. 물론 그 당시 에는 지금의 G & P 같은 신용등급 회사가 있다 하여도, 이들은 부자나라의 꿈 같은 이야기 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가난한 나라에게는 해당이 없던 이야기였다. 이래서 64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공식 방문하여, 경제개발기금으로 빌린 돈에 대한 지불보증을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박대통령이 독일을 가시게 된 방법을 말씀 들여야 하겠다. 대한민국의 젊은 이들이 거리엔 널려있고 이들은 무직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남녀가 공통상황이었다. 그리고 국내엔 굴뚝산업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들을 소화할 능력이 없었다. 이래서 해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빈곤을 없애 보자고, 군사혁명을 해 놓고 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을 위시하여 혁명 주체세력들은 미국으로 갔다. Kennedy 대통령을 만나,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점을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Kennedy 대통령은 이들을 문전박대 하였다.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소리 쳤다. “박 장군, 군으로 원대복귀 하시오.” 그래서 이들은 열이 올랐다. 문전박대뿐만이 아니고 농산물무상원조도 중단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던져주던 농산물무상원조 덕분에 그런대로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어려웠다.

 

일본에 요청하는 것도 검토하였지만, 국교가 없는 상항에서 할 수도 없고, 때 마침 2차 대전 후, 연 평균 8% 대를 고속 성장하고 있던 서독을 주시하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히 일어 서고 있는 서독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보자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군사정부는 혁명 후 6개월 뒤인, 196111월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차관교섭사절단을 서독에 보내기로 한다. 이에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1호로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국토건설 단의 일원으로 논산훈련소에 나가 있던 백영훈 교수가 정 상공장관의 보좌관으로 합류한다. 추후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의 권유로 한국산업개발 연구원 원장(KID)으로 당시 한국일보 옆에 차리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백원장은 독일에 머물면서 본인의 지도 교수였던 Voigt 교수에게 Erhardt 경제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매일 동기 동창인 Voigt 교수 사모님에게 애걸복걸 하였으나 독일 정부는 끄 덕도 안 했다. 미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히 컸다.

 

서독의 경제장관은 아데나우어 수상에 이어 2년 뒤에 수상이 되는 Voigt 교수의 친구였던 루드비히 에어하르크 수상이었다. 라인 강의 기적은 사실상 Erhardt 신임 수상의 작품 이었다. 그러나 이때 독일도 소위 마샬플랜으로 미국의 영향권내에 들어 있었고 Kennedy 대통령의 입김은 한마디로 이곳에도 미쳐, 대단 하였으며 파키스탄에서 시작된 군사 혁명의 회오리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측에서 허용할 경우, 동남아 각국에 번질 혁명 의 회오리는 것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점을 우려한 Kennedy 대통령의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 군사혁명에 대한 반대는 이해할 만 하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Voigt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1981 12 11 즉 박대통령의 독일방문 3년 전, 마침내 한국사절단은 루드비히 베스트리크 경제차관을 만났다. 그리고 이 튼 날에는 경제장관인 Erhardt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 5천만 마르크(미화 3,000천만 달러 상당)의 상업차관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경제개발을 위한 상업차관이었다.

 

분단국인 경우, 양 체제에 공히 동일한 형식의 Hermes 차관 형식도 아닌 한국에 유리한 차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독일에 남아 있던 백원장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간인 출신의 천병규 장관 등, 재무부를 통해 수소문 하였지만, 지금과는 달리, 국가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협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백원장과 대학을 같이 다닌 Schmidt 노동부 과장이 신응균 대사에게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찾아와 지급보증 관련, 요청하였다. 즉 서독사람들은 선진국이면서도 의리 면에서 한 번 사귀면 꽤나 오래가는 사람 들였다. 그래서 온 서독의 과장이었다. “지금 서독에는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지고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 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 보내줄 수 있겠는가? 간호조무사도 한 2,000명 정도 필요하다. 시체 닦는 일등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들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의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신 대사는 한국정부에 긴급 전보를 쳤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광고가 났다. 당시 한국 광부의 한 달 봉급은 한국 국내 임금의 7-8배에 해당하였다.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40% 가까이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 달러) 태국 (260 달러)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며, 한국은행의 외화잔고는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정부에서 발표한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운집하였다. 6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별 기준을 경력 2년 이상으로 내걸었는데도 탄광 갱도조차 구경하지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하였다. 대 도시에 사는 대학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하였다. 1963년 9월 13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 여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 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을 내면, 가짜 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하였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조사할 계획이다.” 이렇게 선발된 아국 광부 1 123명이 뒤셀도르프 공항에 1963년 12월 22 오전 5시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상기와 같은 고 임금을 받고 서독과 같은 선진국에서 일 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는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서독 정부는 지열이 말이 아닌, 지하탄광 1,000m에 들어가 일하는 우리 광부들과 그리고 굳은 일을 마다 안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친절한 우리 간호요원들에게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 병원에 입원하였던 독일 고위인사 들은 한결 같이 좋은 이야기뿐 이었다. 그 중의 한 분이 Johan Wagner 집권 기민연합 (CDU) 사무총장이었다. 그래서 이들 서독 정치인은 한국이란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 대통령을 공식 초청해야 한다!” 고 서독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정부에 대한 건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래서 가는 비행기도 없이 상용 칸에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박 대통령의 서독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고 나는 2013.3.28. 목요일이었다. 대한민국외교협회 회원들로서 주요국 대사를 모두가 역임한 7-90대의 인 테 리 노인들 40여명과 같이였다.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개인 대한해협의 일본 섬 쓰시마(대마도) 섬에 배 편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쓰시마 섬 사람 들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그렇게도 재독 동포들과 유사할 까 하고 무릎을 쳤다. 다른게 아니고 이러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막 정권을 잡았을 당시, 모든 서류가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다. 그런대 한국과 일본에서는 상대방의 이런 특수한 사정을 이해 안고 장군 명의로 우리 황제에게 서신을 해?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하고 삐저 있어, 쓰시마 군주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중국을 쳐야 되겠는데, 조선 보고 길을 비켜 달라고 하였는데 답장이 없다고 야단이었다. 쓰시마 섬은 고래로 조선이 없으면 먹고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선에 의지하고 살았는데 큰 일이었다.

 

이에 대마도, 즉 쓰시마 군주는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 끝에 문서를 위조하기로 하고, 한국측 황제의 편지와, 그리고 일본 측은 도요또미장군의 서한이 아닌 황제의 관인을 위조 고무로 새겨 길을 비켜 달라는 일본 측 요구에 환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그 도장들을 의젓하게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해 놨다.

 

내가 독일에 도착하여 대사님으로부터 영사 임무를 받고 영사로서 첫 업무를 개시하던 19782월 어느 날이었다. 통역관이 결혼 서류라고 가져 온 서류가 이상하였다. 이 때는 각 광산마다 통역관이 있어 이들이 대사관 출입을 할 때였다. 결혼서류라고 가져왔는데 한국 각 면 사무소에서 발행한 호적등본을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관인이 너무 선명하고 어제 호적등본에 찍은 관인마냥, 뭔가 이상하였다. 감자라는 것이 도장파기에 손 쉬웠다. 그래서 자주 광부들이 애용하였다. 그것을 추려놓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부터 처리를 하였다. 그렇잖아도 독일에 도착 이후, 호적등본번역확인작업 관계로 애 아버지가 총각으로 여러 번 둔갑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둘이 있는 한국에서의 애 아버지가 갑자기 총각으로 변하여 처녀 간호사하고 결혼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내가 그 동안 입버릇처럼 해도던 할머니라도 좋다, 우리 집 할머니만 아니면!’ 남자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들 할 것이다. 처녀가 어디 간! 그런데 내가 이런 소리를 전에 했더라면 우리 집사람하고는 못 살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수당 때문에 생긴다. 내가 이렇게 지금 중얼댄다고 해서 독일사람들한테는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말한다고 하면, 불합리한 것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애가 셋이 있어, 매월 2천 마르크씩 수당을 더 탄다면 (총 월급 4천 마르크 정도) 1,000m 지하갱도에 들어 가 있는 사람들의 눈 색이 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이들 수당이 봉급수준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아이가 두 명씩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입장에선 더 받게되는 수당이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몽땅 송금이 되니 그리 나뿔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 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상기와 같은 위조가 횡 횡 한다. 통역관들은 부탁한 사람들에게 해다 줘야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그러나 이들은 솔직할 때를 안다. 그래서 영사의 한마디가 중요하였다. “어떻게 된 거요?” “다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러면서 통역관들은 솔직히 그 사람의 경력 전체를 이야기한다, 사실대로 말이다. 이들은 솔직 할 때 솔직하고 안면을 바꿀 때, 바꿀 줄 안다.

 

그러다가 쓰시마 사람들의 거짓말이 탄로가 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혼 줄에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를 안내여인이 하였다. 나는 독일 쪽을 보고 한마디 하였다. “사실이 가장 좋은 거짓이며 핑계거리거늘! 어디나 인간이 있다면, 돈이 항상 문제를 일으켜!. Glueckauf 1진이 곧 간다 하여도, 젊은 사람들은 솔직한 것을 좋아 할거야! 그래서 우리의 국운이 상승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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