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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구 / 옛날은 가고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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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78회 작성일2021-05-14 10: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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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은 가고 없어도

 이경구 전 주센다이 총영사

   오늘은 내가 따듯한 아침 햇살이 비치는 서재에서 손승교(孫承敎) 시인의 자서전 상권을 펼쳤다. 손 시인은 자서전 상하권에 평생의 발자국들을 1천여 수의 시조와 130여 편의 동요로 기록한, 존경받는 시조 시인이다.

 

   상권 첫머리에 있는 손승교 부처의 근영, 1908년 저자 출생 당시의 행인들이 두루마기를 입고 광화문을 지나가는 풍경, 1924년 매동보통학교 5학년 학생들의 바지저고리를 입은 모습들, 193225세 때 외금강에서 찍은 독사진 들 빛바랜 흑백 사진에 담긴 옛날이 정다워 보인다.

 

   내가 손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정월이었다. 하루는 중앙청 외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쓴 손 시인이 족두리에 한복을 입은 부인을 동반하고 찾아왔다. 손 시인은 내 지인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하면서, 자필 사인이 있는 책 두 권을 전하고 돌아갔다.

 

   강남 노량진 집에 돌아와 연두색 표지 책들을 보니, 『금산 시조집 자화상(錦山詩調集 自畫像)』 이라는 자서전이다. 308쪽 두께의 상권은 1969 5월 왕지사 (旺志社)에서, 446쪽 두께의 하권은 1976 5월 아인각(亞人閣)에서 발간하였다. 자서전 상권의 후기에는  “매동보통학교에 다닐 때 김세연(金世涓) 선생님은 일인 교장 몰래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왜선 격파의 장쾌한 장면을 틈틈이 들려주시었다.”라는 글이 있는데,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우리 뾰족집 서재에 앉아서 인생의 쉼터 같은 『자화상』 상권에 있는 시조들을 읽노라니, ‛옛날은 가고 없어도’라는 시구가 눈길을 끌었다. 작곡가 이호섭(李瑚燮)은 그 시구가 담겨 있는 시조에 곡을 붙였다. 성악가들이 즐겨 부르는 그 가곡의 내용은 이렇다. “더듬어 / 지나온 길 /  피고 지던 발자국들 / 에이는 / 아픔 대신 / 즐거움도 섞였구나 / 옛날은 / 가고 없어도 / 그때  어른거려라 / 옛날은 / 가고 없어도 / 그때 어른거려라 //” 나는 인터넷으로 그 회고조의 가곡을 찾아서 불렀다.

 

   상권 동요 부문에는 「달팽이」라는 동요가 있다. 이 노래에도 이 작곡가가 곡을 붙였는데, 멜로디가 경쾌하다. “무겁지 않을까요 달팽이 집은 / 집 볼 사람 없어서 지고 다녀요 / 얼마나 무거울까 나도 모르게 / 달팽이를 손 등에 얹어봅니다. //” 비가 내리는 날은 우리 밀러스 크리크 마을의 동쪽 콘크리트 보도 위에 달팽이가 나타나서 까마귀가 모여든다.

 

   상권 마무리에는 이호섭 작곡가의 발문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제1은행에 계실 때, 당행 行友誌에 게재한 선생의 동시 「어머니의 얼굴」에 작곡을 하게 된 것이 선생과의 교분이 오늘에 이른 동기가 되었다.” 작곡가는 손 시인의 작품 10여 편에 곡을 붙였다. 2020년 가을에 ‛KBS 아메리카’에 출연해, 꺾기와 바이브레이션과 감정 표현에 관해 설명할 때는 나도 들었다.

 

   나는 40여 년 전에 손 시인에게서 『자화상』 상하권을 기증받고도, 창고에

 

보관하고 재외 공관 생활을 하게 되어서  읽어 볼 기회가 없었다. 외무부를 정년퇴직한 후 시애틀 인근 도시에 있는 마을로 이민을 올 때 다른 도서들과 함께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서고를 정리하다가 손 시인의 책들을 발견해서 정성을 기울여 읽으니, 날마다 좋은 날이다.

 

   오늘 오후는 『자화상』 하권을 열었더니, 첫머리에 병풍을 배경으로 찍은 ‛결혼 45년의 저자 부처’라는 천연색 사진과 ‛心爲法本 中心念善 即言即行 福樂自追’라는 전자체(篆字體) 붓글씨 사진이 있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 속에 착한 일 생각하면 그 말과 그 행동도 또한 그러하리라. 즐거움도 그를 따르리.”라는 뜻이란다. 옛날 내가 서울에 살 때 손 시인은 그 한문을 한지에 써서 종이 상자에 담아 나의 직장으로 보낸 적이 있다.

 

   하권의  ‛끝없는 歲月’ 부문에 게재한, 시인 집에서 옛날부터 간직하였던 색이 많이 바랜 태극기, 미국에 있는 딸에게 보낸 한글 붓글씨 병풍, 시인이 붓글씨로 쓴 동요 「어머니의 얼굴」을 수놓은 병풍은 명품 사진이다. 손 시인은 밀양 손씨 집의 장손으로 1908년 음 12 27일 당주동 72번지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음 8 10일 결혼하여 슬하에 3 3녀를 두었다. 그 당시에는 모두 음력을 사용하였다. 1931년에 학업을 마치고, 34년간을 은행 생활과 금융인으로 지내다 보니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었더란다.

 

   하권의 ‛잊었던 寶庫’ 부문에는 35편의 서울의 사적에 관한 시조가 담겨 있다. 시조 「南別宮」의 내용은 이렇다. “공주님  왕자님도 집을 비워 안 계신데 / 明將에 日軍까지 나그네를 들였구나 / 圓丘壇 허물어지고 자취 없는 남별궁. //” 손 시인의 해설에 따르면, “南別宮은 中區 小公洞의 現 조선 호텔 자리에 있었다. 조선 太宗의 둘째 따님 慶貞公主의 宮이었다. 壬亂 때는 日軍 總司令部가 있었고, 日軍이 물러간 후에는 明軍이 들어와  李如松이 주둔하였다. 光武(1897) 元년 圓丘壇을 쌓고 高宗의 大皇帝 卽位式을 거행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명재상인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 보면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지원 요청을 받고 명나라가 파견한 명군의 총사령관이다. 그런데 내가 책꽂이에 꽂아 두고 참고하는, 1996 3 1일 발행된 『고등 학교 국사』의 상권 154쪽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있어도 ‛이여송’이라는 이름이 없다. 상권  217쪽의 ‛찾아보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말이 나오는데, 학교에서 한자 이름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고등 학교 국사』 하권 97쪽에는 조선 고종 당시의 국내 정세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아관 파천 1년 만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교과서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를 적어 넣으면 어떨까.

 

  『자화상』 하권 후기에는 손 시인 출생 당시의 역사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07 1 31일 일본 통감부가 업무를 개시하였다. 1907 8 27일 순종 황제 즉위식이 경운궁에서 거행되었고, ‛예의 동방 군자국(禮義東方君子國)은’으로 시작하여 ‛대황제 폐하 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로 끝나는 ‛경축가’도 불렀다. 1910 8 23일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같은 해 11월 한국인이 저작한 학교용 교과서가 몰수되었다.

 

   조석으로 날씨가 서늘해졌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손 시인의 자서전 하권에 있는 ‛1968년 회갑의 해, 저자 내외(68세 때)’라는 천연색 사진을 보니, 사진 속의 시인 부부가 나를 반기는 것 같다.  

 

   삶의 발자국을 시조와 서예와 사진으로 만들어, 후인에게 남긴 손 시인의 자서전은 기록 문학의 전범이다.                                                    

                                                                          [2021. 5  <한국수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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