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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 어린 꿈나무 소녀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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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448회 작성일2017-07-21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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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꿈나무 소녀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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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자이르 대사, 주몬트리올 총영사)

얼마 전 요즈음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을 딸 내외의 초청으로 집사람과 함께 근처 영화관에서 관람하고 막 집에 도착하였을 때다. 감명 깊은 그 영화를 보고 내가 겪은 한국전쟁을 비롯한 과거의 회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40대 초반 쯤의 여인으로 자기는 중2 여학생을 둔 엄마인데 나를 꼭 좀 만났으면 한다고 하였다. 이유를 물은 즉 자기 딸이 장차 외교관을 꿈꾸고 있는데 학교 방학 숙제가 각자 희망하는 직업인을 직접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이라면서 제발 딸의 청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외교부에 문의하였더니 나를 추천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어린 학생의 꿈이 그렇다니 가상하기도 하여 적당한 날을 잡아 만나기로 하였다. 마침 내가 사는 집이 분당이라 근처 커피점에 장소를 정하고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니 두 모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교관이 꿈이라는 그 소녀는 나이에 비해 큰 키에 얼굴이 예쁘고 똑똑하게 생긴 여중생으로 학교공부도 곧 잘하여 전 학년 2-3등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이름이 경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우선 함께 사진부터 찍어야 한다며 갖고 온 스마트폰카메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노트를 펼치며 빽빽이 써온 설문들을 또박또박 질문하는 것이었다. 외교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이며, 몇 년 동안 어느 어느 나라에서 근무하였느냐, 외국 근무 중 어느 나라가 제일 좋더냐, 외교관으로 근무 중 가장 보람차고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 그리고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과 외교관 채용시험에 관한 것 등 약 20여 개 항목을 하나씩 질문하며 내가 대답하는 것들을 꼼꼼히 받아썼다.

 

사실 십여 년 전 은퇴하여 그간 대학에서 ‘국제관계론’이란 과목으로 강의를 하다가 이제 그마저 그만두고 다소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도 가끔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도대체 외교관이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이며 그간 어느 나라들에서 근무하였느냐는 것이었다. 흔히 외교관이라 하면 외교업무를 맡아하는 공무원이라고 막연히는 알고 있으나 그 구체적 기능과 조직 등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외교관의 주요업무 즉, 기능으로는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 on Diplomatic Relations) 제14조에 잘 나타나있다. 5개의 주요기능(임무)을 갖고 있는데 그 첫째가 파견국을 대표하는 대표성(Representation) 즉 자기나라를 대표하는 기능이며, 둘째는 자국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Protection)이고, 셋째는 주재국정부와의 제반교섭(Negociation) 즉 협상이며 네 번째가 주재국의 정세와 사태발전을 관찰하고(Observation), 이를 본국에 보고하는 것(Report)이며 마지막으로 주재국과 자국의 상호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것이다(Good Will Mission). 흔히 외교관들이 바이블처럼 여기고 있는 저 유명한 \'외교론(Diplomacy)\'의 저자 해롤드 니콜슨경은 그의 저서에서 위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외교관은 확고한 국가관과 애국심, 강한 인내심과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뛰어난 어학능력과 주재국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 높은 수준의 학문과 교양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덕목들을 내가 두루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지난 30여 년간 8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총영사와 대사를 거쳐 정년퇴직하였음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간의 외교관 생활 중 내가 가장 보람차고 기뻤던 일은 역시 90년대 초 내가 초임대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한 나라에 대사를 파견하려면 정부는 대통령의 재가를 득한 후 우선 파견국정부에 아그레망(Agrement, 임명동의서)을 요청하여야 한다. 즉 이러이러한 인물을 귀국에 대사로 파견할 예정인데 혹 이견이 있는지, 또한 동의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다. 대략 20-30일 정도가 지나 아그레망의 회신이 오면 신임대사는 자국내규에 따라 인사발령 후 국가원수 즉 대통령에게 취임선서를 하고 신임장(Letters of Credence)을 수여받는다. 이때 신임대사는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별도의 단독면담을 하는 등 특권이 주어진다. 나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식후 개별독대를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은 와병중이라니 걱정이 되고 새삼 감회가 깊다. 외교관이 그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관장(대사 또는 총영사)이 되려면 최소 20-30년 정도 경력을 쌓아야만 되는데 그나마도 초임외교관의 극소수만 가능한 일이나 얼마나 감개무량 할 것인가.

 

특명전권 대사가 되면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는데 외교관 면세, 면책 특권은 물론이고 부임시 항공기1등석이 주어지며 도착 시에는 사전 통보에 따라 주재국 의전 절차에 따라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된다. 신임장제정 의전 절차는 국가마다 다르나 나의 경우는 마침 부임시기가 여름철이라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하기 수도(수도에서 약1,000Km 북쪽도시)까지 대통령이 특별히 보내 온 대통령 특별 전용항공기를 타고 가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연도의 환영인파와 군 의장대사열, 그리고 신임장 제정식 후 가진 대통령과의 환담행사와 공식 만찬 등 실로 외교관으로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외교관의 화려한 이름 뒤에는 말 못할 고초 또한 늘 따르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70년대 초 아프리카 오지에 파견되어 가족과 함께 숱한 고생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집사람이 매일 한 알씩 먹어야 되는 황열병 예방약 중독으로 인한 신경성 위무력증에 걸려 몸무게가 40㎏에도 못 미쳐 들것에 실려 수술 차 서울로 후송 된 후 갓 난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군분투한 일 등 지금도 잊지 못할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어려웠고 대한민국 외교관이었던 것을 창피하게 여겼던 것은 70년대 중반 내가 남미 브라질 상파울로 영사로 근무할 때 당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당시는 이민 초창기라 교포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월남전이 끝난 후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에 영향을 맞은 듯 그 수가 점점 늘어나 곧 만 명을 넘고 있었다. 당시 교포들은 대게 봉제업을 하거나 작은 가게를 열어 소규모 수퍼 또는 과일가게, 세탁업 등 자영업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정착 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교포 중 상당수가 불법이민자 신분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서면서 외국이민자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여 브라질 이민 비자를 얻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따라서 당시 많은 한국 사람들은 비교적 이민이 손쉬운 이웃 파라과이로 거짓이민을 와 브라질로 밀입국 하는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는 어떤 파라과이 이민자들은 이웃 파라과이 수도 아순션공항에 도착하여 짐도 풀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가 이민 브로커를 따라 브라질국경을 넘어 상파울로로 잠입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였다. 당시 브라질 한국이민자들은 90%가 브라질 제1도시 상파울로에 집중되었는데 불법이민자 문제로 우리공관은 브라질당국과 여러 가지로 어려운 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민청에서 영사인 나를 면담하자는 연락이 와 또 무슨 교포사고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보좌관을 데리고 이민청에 도착하였더니 낯익은 담당자는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면서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국민들이 여권조차 내팽개치고 도망가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그는 수십 개의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나오면서 이것들이 다 지난 수개월간 국경선에서 한국이민자들이 버리고 간 여권이라는 것이었다. 국경초소에서 흔히 관원이 조사차 여권을 압수하면 꼼짝없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한국 사람들은 이 여권들을 버리고 도망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유감의 뜻을 표했으나 자기들은 이를 상부에 보고하여 한국이민을 전면 봉쇄할 예정이니 담담 영사가 이 사태에 대하여 자인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과 모욕적인 언사에 실로 가슴이 막히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 갈 심정이 되어 그 여권들을 살펴보고 또 한번 놀라 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교포사회에서 꽤 덕망 높은 유지급으로 행세하는 인물도 있었고 이민 오기 전 본국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특히 그들은 대부분 공관에 와 여권을 분실하였다며 임시 여권의 발급을 요구하면서 그 중 더러는 큰소리로 고함을 치는 등 난동까지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사태인지라 그 후 며칠 동안 저자세로 교섭한 끝에 폐기여권 전부를 내가 돌려받고 영사확인증을 써준 후 겨우 사태를 수습하였다. 물론 담당자들에게 응분의 사례 또한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일은 그 후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수치스러운 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미스런 우리 국민들의 한 면을 어린학생에게 들려주기가 뭣하고 하여 나는 그 여중생에게는 아프리카 남북대치 공관에서 있었던 북한대사관 직원들과의 신경전 등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 어린 학생을 위하여 덕담을 몇 마디 하고는 인터뷰를 마쳤다. 즉 내 긴 외교관생활과 그간 관계한 몇몇 대기업들의 시험면접관으로 참여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사람 볼 줄을 좀 아는데 내가 보기에 경희양은 장차 훌륭한 외교관으로 성공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빛낼 것이 확실하니 열심히 노력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집에 택배가 와 뜯어보니 예의 그 경희양은 지난번 제출한 자기의 인터뷰 방학과제물이 반에서 최고점수를 받아 감사하다는 편지와 함께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꼭 훌륭한 외교관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홍삼선물세트 한 상자를 보내왔다. 부디 이 어린 꿈나무소녀의 기도가 꼭 이루어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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