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남 / 解放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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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363회 작성일2017-07-21 13:55:00본문
解放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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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남 전 주가나 대사
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던 날이다. 이 날의 감격은 지금 80세를 넘은 사람에게는 생생하게 기억날 것이나, 그 아래 세대는 아마도 해방이라는 말보다는 광복이라는 말이나 또는 우리가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정도로만 알지 생생하게 실감나는 날은 아닐 것이다.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날 일왕 히로히또의 방송은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32년 고의로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3성을 점령, 청왕조 마지막 황제부의를 섭정(후에 황제라 칭함)으로 괴리정부를 만들고, 이어 1937년 7월 7일에는 노구교(盧溝橋)사건(Marco Polo Bridge Incident)을 고의로 일으켜 중국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 영, 중국, 화란 등 이른바 A.B.C.D의 압력이 심해지자 기술한 바와 같이 제2차 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 초기에는 동남아 여러 곳을 점령하고 한 대는 그 위세가 제법 그럴듯 하게 보였으나 1942년 6월 미드웨이(Midway)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고 이후 일본의 패색은 짙어가기 시작한다.
드디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아 떨어지고 8월 15일에는 모조건 항복을 수락하고 일왕의 항복방송을 듣게 된다.
이날 필자는 여름방학이라 마을고개 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아이가 시내에서 뛰어 오면서 “형님, 형님, 일본이 항복했어요! 일본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하면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날 그 순간의 감격스러웠던 기분은 뭐라고 표현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감개무량했다.
하기사 1945년이 되면서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전후부터는 부산·시모노세키 간의 연락선 등이 미 잠수함에 의해 여러 차례 격침되고 반도남쪽에는 구라만전투기가 자주 날라오고 항간에는 흰옷을 입고 높은데 가서 손을 흔들면 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8월 16일 필자가 다니는 진주사범학교에 나가보니 1944년부터 間島에서 와서 수학을 가르치시던 강상천 선생이 교무실에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계셨다. 가보니 우리나라의 태극기를 그리면서 국기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이때의 감격스러웠던 기분은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어 17일 시내에 나가보니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망연자실상태이고 몇 군데 벽보에는 조선공화국 수뇌부가 결정되었다고 써져 있었으며 내 일기장에 의하면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統領 金九
首相 李承晩
外相 安在鴻
陸相 金日成
海相 呂運亨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명단은 夢陽 여운형 선생이 좌파세력인 공산당과 상의해서 발표한 것이라 하나 지금도 상세한 사항은 잘 모른다고들 한다.
역사에 萬若이라는 말은 없으나 만약 그 벽보와 같이 우리나라가 건국되었다하면 지금 어떠한 상태일까를 공상해보기도 한다.
필자가 보관하고 있는 해방 전후의 일기장과 금전수지장에 의하면 1930~1940년대에 걸쳐 여러 가지 일들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대학교로 되어 있으며 보통학교는 2년제 간이학교, 4년제와 6년제 보통학교, 5년제 고등보통학교, 3년제 전문학교, 6년제 대학교(2년 대학예과)로 되어 있으며 한 面 하나 정도 있는 보통학교에 가려면 면접시험을 거쳐야했으며, 취학연령은 보통 7~8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선어독본으로 우리말을 공부할 수 있었으나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1938년 이후에는 아예 조선어 교육을 폐지해버렸다.
전쟁말기에는 고등보통학교는 4년, 전문학교는 2년, 대학교는 3년으로 단축하고 젊은이를 전쟁터 아니면 노동력으로 동원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군용품이외의 물건은 저질화되면서 물가는 각종통제에도 불구하고 많이 비싸졌다.
1940년 시중 일반대중목욕탕 값은 7전이었으나 해마다 1전씩 올라갔고 물건이 귀하게 되니, ‘야미(일어로 캄캄하다는 뜻)’ 거래가 생기고 그나마 구하기 힘든 물건이 많았다.
해방 전 우리나라의 미곡 총생산량은 평년작으로 2,400만 석인데 供出이라는 이름으로 1,600만 석을 강제 제공케하여 군수용(?)으로 가져가고, 그 대신 만주에서 기름짜고 남은 콩깨묵을 배급해주기도 하였으니, 봄철에 환자가 생겨 쌀로 미음을 먹이고 싶어도 쌀이 귀하여 동분서주해야 했다.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암담하고 처참한 시기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3,000만 동포가 얼마나 춤추고 뛰면서 해방을 기뻐했겠는가!? 지금도 ‘해방’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을 듣고 춤추는 군중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감격스럽고 기쁨에 날뛰던 해방에 이어 1948년 8월 15일에는 38선 이남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이북에는 소위 인민공화국이 탄생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니, 해방에서 이 시기에 이르는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혼돈, 혼란, 격랑 정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좌, 우익 간의 싸움이 격심한 시기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三相회의에서 우리나라를 앞으로 5년간 신탁통치 후, 독립하게 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처음에는 좌·우익 모두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쳤는데 좌파공산당이 하루밤 사이에 찬탁을 외치게 되어 좌·우 간 반목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어 1946년, 1947년 양차에 걸쳐 한국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소위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진술한 바와 같이 남·북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분단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건국 후 채 2년도 안 되어 6·25 전쟁이 북측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3년 여에 걸쳐 전 국토는 ‘W’ 모양으로 남침, 북진, 남침, 북진이 이루어져 전 국토의 파괴상은 그 어느 전쟁보다 처참하게 되었다.
각설하고 해방 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속요 중에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밑지 말고 일본이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필자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이는 “흰옷 입고 산에 오르면 방공호 안 가도 된다”는 말과 더불어 당시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통의 말인 것으로 생각해본다.
해방이 되고 70년이 지나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제2차 세계대전의 잔재물처럼 남과 북으로 양단되어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으니 생각할수록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분단해놓은 당사국들이 조금이라도 결자해지(結者解之) 하는데 힘써주기를 기대하기에는 작금의 국제사회는 너무나 냉혹하고 거리가 멀다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다가오는 시대는 통일만이 찬란하게 번영, 발전할 수 있는 길임을 굳게 다짐하고, 통일성취를 위해 만전의 노력과 힘을 쏟아 부을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해방 70년을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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