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조현 / 한국에 공존하는'민주주의 유전자'와 '독재순응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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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18회 작성일2025-05-27 15:28:07본문
한국에 공존하는'민주주의 유전자'와 '독재순응 유전자'
2025-05-22 13:00:01 게재
외교협상은 원래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협상 후에 언론을 대할 때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외교에는 다시 만날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 뒤에 언론에 흘린 이야기들은 외교를 개인의 욕심이나 국내정치에 연관 지어 국익을 훼손시키는 문제점을 모두 보여주었다.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의 한국 상황은 외교하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외교를 개인의 욕심에 연관지어 국익훼손
지난 5월 1일에는 세명의 고위 인사가 뉴스에 올랐다. 한덕수 대행과 최상목 부총리가 사퇴선언을 한 날에 조희대 대법원장은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재판을 했다. 겉보기엔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헌법적 질서를 훼손했다. 이것은 계엄정권의 연장을 위한 출마 선언, 무책임한 퇴진, 법원의 대선 개입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뉴스를 보며 작년 12월 3일 국회에 진입한 군인들이 떠올랐다. 내란에 일찍이 가담한 사령관들이 아니라 명령을 받은 군인들 말이다. 일부 지휘관들은 부당한 지시에 나름 저항한 것이 알려지면서 신원이 밝혀졌지만 대부분은 무명으로 남았다. 그들이 그날 밤 헌법을 위반한 명령을 받고 복종과 항명 사이의 딜레마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하니 연민이 밀려왔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필자도 국가의 체면을 손상하는 정권홍보를 지시받고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급이 낮아도 헌법을 지키려고 고심한 공직자들은 공공연히 헌법을 위반한 최고위 공직자들과 크게 대비된다. 공직자의 역할은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계엄은 많은 공직자들을 시험에 들게 했다.
계엄 직후인 작년 12월 5일 방한한 미국의 전직 대사들과 조찬이 있었다. 이들의 관심은 당연히 계엄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들 역시 궁금해했다. 필자는 계엄이 편집광적인 대통령과 무속에 빠진 그의 부인이 만들어낸 일탈적 사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고 했다. 따라서 국회의 탄핵과 헌재의 인용이 곧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 계엄에 관해 문의해 오는 외국인 지인들에게도 같은 논리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빠르게 복원될 것이라는 설명을 반복했다. 하지만 의외로 계엄의 여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월에는 서울지방법원 난동 사건이 발생했고 계엄을 지지하는 집회도 계속됐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심판을 4월 초까지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필자는 미국UCLA와 USC(남가주대학)의 초청을 받아 트럼프 시대의 한미관계를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 직전에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강압적인 정상회담을 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인상을 발표했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외교였다. 그렇지만 필자는 한미관계가 한국이 가진 여러가지 전략적 강점에 비추어 윈-윈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내용을 강연문에 담았다.
그러나 LA행 비행기 안에서 문득 고민이 떠올랐다. 실패한 쿠데타가 4개월 가까이 진압되지 않고 있고 계엄 지지자들은 결집해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필시 질문이 나올 텐데 어떻게 답을 할 것인가? 일탈적 사건으로만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때 떠오른 것이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밈(meme)’ 이론이었다. 동물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 사회도 사회, 문화적 유전자 즉 가치나 규범, 정치적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전자가 바로 그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주장이다.
조선의 왕정과 일본의 군사 통치를 받은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지만 1945~1948년 미군정기 때 미국식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 나갔다. 특히 미국의 교과서를 번역해 광범위하게 보급한 결과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 이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사회적 유전자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2차대전 후의 다른 신생독립국들과 달리 민주주의를 빨리 가꾸어 나간 것은 우리의 인본주의 전통과 높은 교육열이 근간이 되었지만 이렇게 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민주주의 학습의 역할도 컸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이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같은 국민 주도의 정치 변혁을 가능케 했다.
우리의 민주주의 유전자 더 강해질 것
하지만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 또한 하나의 사회적 유전자를 남겼다. 독재에 순응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체제에 적응하는 습성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우리는 이번 계엄을 계기로 우리 사회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독재 순응의 사회적 유전자가 발현하는 것을 목도했다. 헌법을 수호한다는 고위공직자들의 가면이 벗겨졌다.
이제 한국 사회엔 두개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계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유전자를 대변하고 내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독재순응의 사회적 유전자를 나타낸다. 이 두 유전자가 충돌하면서 한국사회는 지금 혹독한 열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 열병을 이기고 나면 우리의 민주주의 유전자는 더 강해질 것이다. 아프고 난 후 면역을 얻는 것처럼 독재에 대한 항체가 생기는 것이다. 계엄이 정리되는 데 긴 시간이 걸리고 경제적 비용도 크지만 어쩌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키기 위한 비용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날 강연에서 사회적 유전자 이론을 빌려서 계엄찬성 집회와 늦어지는 탄핵 결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결국은 더 건강하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마침 강연 뒤 UCLA 교수들과의 만찬 때 헌재의 탄핵 인용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의 4월 3일 아침 11시는 LA에서는 저녁 7시였다. 참석한 교수들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이겨낸 데에 대한 축하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곧 대선을 앞두고 있다. 국제 정세 또한 쉽지 않은 국면이다. 미국 발 통상위기, 미중전략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경제안보 조치로 인한 공급망 재편 등 국제정세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외부 여건 속에서도 우선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정비해야 한다. 외교도 중요하지만 대선을 통해 독재 순응의 사회적 유전자를 바꾸어야 한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최근 펴낸 회고록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구성원 모두의 노력을 강조했다. 동독에서 태어나 공산치하의 물리학자로 활동했던 그녀가 16년간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낸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이지만 지금의 한국 상황을 고민하는 사람의 눈에 번쩍 띈 것은 바로 이 구절이다.
민주주의 재정비와 실용외교로 나아가야
“자유에는 민주주의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자유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안에서든 밖에서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참여해야 성공할 수 있다.”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 한길사, 739쪽)
필자는 윤석열정부의 외교가 허세와 과잉의전, 지나친 이념 편향으로 잘못되고 있다고 비판을 해왔다(내일신문 2024년 12월 칼럼). 그러나 새 정부는 지난 정부의 탓을 하지 않고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통합적 지지를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도와 효율, 합리성과 전략이 있는 실용적 외교정책을 만들어 나가고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초당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노력도 해야 할 것이다.
외교의 힘은 국민의 단합과 이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그 힘을 바탕으로 조용하지만 현명하고 품위 있는 외교로 혼돈의 국제정세를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조 현
전 유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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