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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월남탈출 교민,생계위해 이란行 택했다/김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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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2,529회 작성일2012-02-24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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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월남탈출 교민,생계위해 이란行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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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난민 입항
부산에 입항한 트윈 드래곤 호 선상에서 선원들과 월남 피란민들이 마중나온 부산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본사자료) 1975.5.23(부산=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월남패망 직후 \'보트피플\' 탈출 김창근 당시 서기관 회고
美日佛 대사관서 협조거부..표류중 만난 선박들도 외면

(서울=연합뉴스) 이성섭 강병철 기자 = 1975년 4월 30일 월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급박한 상황 속에서 미처 월남 땅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심 거리를 정신없이 헤맸다.

이런 군중 속에는 주(駐)월남 한국대사관의 김창근 2등서기관 일행도 있었다. 그는 강변에 있는 일본대사관의 정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북(北) 베트남군의 사이공 진주를 앞두고 미국대사관에서 헬기 탈출을 시도하다가 좌절된 직후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상공에는 수십 대의 미군 해병대 헬기가 귀청을 찢는 기계음과 함께 선회하고 있었다. "저 헬기만 타면 살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김 서기관은 헬기를 향해 뛰어가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김 서기관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 미군은 헬기 수십 대를 동원해 귀대하지 못한 해병대원 1명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김 서기관의 \'월남 탈출기\'는 극한 상황에 놓인 약소국 국민의 서러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 서기관이었던 김창근 전 카자흐스탄 대사는 지난주 외교열전 취재진과 만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때 상황을 들려줬다.
◇월남 대통령궁 폭격..철수 준비 개시 = 1975년 4월 8일 오전 8시께. 월남 주재 한국 대사관 2층 사무실로 \'쓩쓩\' 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곧 무언가 터지는 \'쾅쾅\'하는 소리가 김 서기관의 귀를 때렸다. 동시에 사무실 유리창 파편이 발밑으로 쏟아지고 대사관 직원들은 혼비백산했다.

대사관에서 100m 거리에 있는 월남 독립궁(대통령궁)이 전투기 폭격을 당한 것이다.

다들 "베트콩이다"고 생각했지만 이 폭격은 월남 공군의 웬탄쭝 중위가 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공식적으로는 이 조종사가 북베트남 공산당 프락치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서기관은 당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고 철수할 때 정부가 자신의 가족을 챙기지 않아 보복한 것\'이란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

이 직후 한국대사관은 월남 철수를 위해 미대사관과 본격 접촉에 나섰다. 김영관 대사가 이날 김 서기관에게 공문을 주면서 미대사관에 전달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유사시 철수 협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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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귀환 교포 및 난민
부산항에 입항, 상륙하는 월남귀환 교포 및 난민.//(본사자료)1975.5.13(부산=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공문을 받은 미대사관은 김 서기관에게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면 무조건 포인트 10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미대사관은 월남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었으며 포인트 10은 미국인이 거주하던 아파트였다.

이날 이후 김 서기관의 주 업무는 \'라디오 듣기\'가 됐다. 잘 때도 라디오를 끼고 있었다. 1천여명의 교민 철수를 위한 준비도 시작됐다. 한국에서 전차양륙함(LST) 2대가 오기로 돼 있었는데 교민 수송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LST를 사이공 부두로 대야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월남 정부는 "결사 항전"을 외치면서 주민 안정에 필사적이었다. 심지어 전투기를 띄워 사이공 주변을 맴돌게 하면서 주민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 상황에서 월남이 교민 철수용 LST 입항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구호물자용이란 구실이었다. 구호물자를 전달하려면 시내 가까이 와야 하기 때문이다.

월남 정부는 당시 LST의 입항을 축하하며 환영식도 열어줬다. 김 서기관에게는 훈장도 줬다. 그러나 LST의 입항 목적이 \'월남 탈출\'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월남 외무부 직원까지 자신의 가족을 LST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은 교민 철수를 앞두고 노래자랑 등의 행사를 며칠간 열었다. LST가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교민을 모여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길게는 20년 가까이 월남에 거주한 교민들은 철수의 급박성을 느끼지 못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LST가 4월26일 떠나기로 갑자기 결정되면서 대사관은 밤새 급조한 승선표를 교민에게 발급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1천300여명의 LST 탑승자를 확인해보니 한국인 교민보다 한국인의 월남인 부인, 그 친정 가족, 한국과 무관한 월남인ㆍ중국인 등이 더 많았다.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대사관은 별 수 없이 그대로 LST를 출항시켰다.

◇대사관 직원 철수.."미군 헬기만 믿었다" = 한국 정부는 대사관에 "적절한 시점에 철수하라"고 지시했었다. 이에 4월 초까지 대사관 직원의 가족은 떠났고 LST가 출항 후에는 대사 등 10여명의 직원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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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피란민 입항
월남 피란민을 태우고 부산항에 들어오는 트윈 드래곤 호.//1975.5.13/(본사자료)/(부산=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미대사관은 27일께 \'비행기를 마련해줄 테니 연락이 가면 비행장으로 오라\'고 다시 연락해 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비행장이 폭격당하자 미대사관은 28일 오전 "포인트3(미국 국제개발처 USAID 숙소)으로 이동하라"고 급전을 쳤고, 대사관에 있던 직원ㆍ교민 일행은 70여m 떨어진 포인트3으로 부리나케 이동했다.

그런데 대사 차량을 선두로 현지에 도착해보니 울타리 문은 잠겨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대사 차량이 포인트3을 한바퀴 돌아보더니 갑자기 전력 질주했다. 목적지는 미대사관. 그곳은 이미 수천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김 서기관이 한국외교관이라고 밝히고 진입해 보니 김 대사는 이미 미대사의 방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김 서기관은 그 앞에서 기다리다가 감감무소식이자 급히 대사관 뒷마당으로 갔다.

그런데 김 서기관 일행이 뒷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철커덩\'하며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뒷마당과 헬기탑승장으로 이용된 앞마당ㆍ옥상을 연결하는 철문이 닫힌 것이다. 미군 해병대는 그때부터 헬기에 탈 인원만 불러내 문을 통과시켰다. 물론 미국인이 가장 먼저 호명됐다.

철수작전은 더디게 진행됐고 오후 8시가 넘어도 대사관 일행 차례는 오지 않았다. 미대사관의 협조를 다시 구하기 위해 이대용 공사가 대사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공사는 앞서 미대사 방에 들어간 김 대사가 이미 떠났다는 소식만 갖고 나왔다.

피를 말리는 기다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9일 새벽에야 한국인과 월남인 등도 일부 헬기에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벽 4시가 넘어서 갑자기 휘파람 소리와 함께 미 해병대가 총구를 한국인 등을 향해 겨누면서 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러다 미 해병대가 한두 명씩 슬금슬금 대사관 건물로 들어갔고 마지막에 들어간 병사가 출입구를 닫았다. 그들은 헬기 이륙과 동시에 마당으로 최루탄을 쏘기까지 했다.

김창근 전 대사는 "자기들 탈출에 해코지할까 봐 쏜 것"이라면서 "참 기가 막혔다"고 회고했다.

미대사관을 통한 탈출이 무산되자 김 서기관 일행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프랑스대사관을 향했다. 프랑스는 남ㆍ북베트남과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어 북베트남으로부터도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수차 프랑스대사관의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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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난민 입항
23일 트윈 드래곤 호에서 내리는 월남 난민들.//(본사자료) 1975.5.23(부산=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 서기관 일행은 다음날인 30일에는 일본대사관으로 갔다. 일본은 경제원조 등으로 북베트남과도 우호국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대사도 우리 대사관 일행의 피난처 제공 요구를 거절했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으로 들어온 뒤인 5월1일 김 서기관 일행은 프랑스병원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 병원으로 일대사관의 와타나베 참사관이 왔다. 그는 "한국외교관은 잡히면 북한에 넘겨진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김 서기관이 자살을 결심한 것은 그 말을 듣고서였다. 병원 뒷마당에서 죽으려고 면도날을 구하려던 때에 병원에서도 한국인 일행을 쫓아냈다.

김 전 대사는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살고 싶다는 오기가 들더라"고 말했다.

김 서기관 일행은 교민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일부 교민은 여기서 독자적인 탈출계획을 세웠다. 다른 대사관 직원은 도망치다 잡히면 오히려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출을 포기했지만 김 서기관은 탈출에 합류했다.

◇\'보트피플\' 표류..이란행(行) 택한 교민들 = 5월3일 정오께 김 서기관은 교민들이 마련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는 김 서기관을 포함해 5명의 성인 남자와 그들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버스는 사이공을 벗어나 롱하이로 갔다. 3시간가량 동안 7곳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검문 때마다 "원래 살던 캄란으로 가는 교민"이라고 속여 무사히 통과했다. 김 서기관도 출발 직전에 가짜 교민증을 만들어둬 신분이 발각되지 않았다. 이동 중간에 북베트남군을 태우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롱하이에서는 교민들이 돈을 주고 배를 임차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진 뒤 바다로 나아갔다. 보트탈출의 우여곡절은 배를 몰던 베트남 선원이 애초 계약한 캄란이 아닌 태국으로 가자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교민들은 처음에는 이들을 묶어 선실에 가뒀다가 나중에는 풀어주고 배 뒤편에만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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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탈출 과정 설명하는 김창근 前대사
(서울=연합뉴스) 강병철 기자 = 1975년 4월30일 월남 패망 당시 주월남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근무했던 김창근 전 카자흐스탄 대사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월남에서 탈출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11.9.26 soleco@yna.co.kr

밤이 깊어지면서 김 서기관이 키를 잡았다. 한 교민은 그에게 "남쪽의 저 별과 하늘 위 저 별, 뱃머리가 지나가면 생기는 물거품을 일직선으로 맞추고 남쪽으로만 가면 된다"고 일러줬다.

배에서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베트남 선원들을 건져 올린 사건도 있었는데 베트남 선원들이 탈출시도 직전에 연료를 거의 다 빼내는 바람에 표류하는 신세가 됐다.

김 서기관 일행은 중간에 지나가는 여러 국적의 선박들도 발견했지만 선박들은 좀처럼 이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충돌을 각오하면서까지 한 선박에 접근하는 기지를 발휘한 끝에 그 선박에 오를 수 있었다. 목적지인 싱가포르에 거의 다 와서 그 선박에서 다시 쫓겨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5월8일 마침내 싱가포르 항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입항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해안경비대는 이들을 난민으로 취급해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 서기관이 해안경비대 선박에 올라타 그동안 신발 깔창에 감춰뒀던 외교관 여권을 보여주고 한국인이란 것을 납득시켰다.

김 서기관은 해양경찰청에서 싱가포르 총영사관에 전화했다. 이후 교민들에게 돌아가 고국행을 도우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민들의 입에서는 "이란으로 가겠다. 이란은 도착 24시간 이내 일자리를 구하면 체류허가가 나온다"는 대답이 나왔다.

한국에 가도 먹고살기 어려우니 이란에서 건설 노동자를 하겠다는 것이다. 김 서기관은 이때 다시 한번 이역만리에 내던져진 약소국 사람들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김 전 대사는 5월11일 귀국에 성공하기까지 당시 상황을 돌아보며 "사람도 나라도 남에게 절대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우리 스스로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탈출 과정에서 김 서기관과 헤어진 뒤 공산군에 붙잡혔던 이대용 공사는 사이공 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른 뒤 석방돼 귀국하는 고초를 겪었다.

◇김창근 전 카자흐스탄 대사 = 1962년 외무부에 들어간 뒤 주(駐)월남 서기관, 멕시코ㆍ러시아 공사, 코스타리카ㆍ카자흐스탄 주재 대사 등을 지내는 등 특수지역 공관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외교부 입부 직후에는 일본과 월남, 수리남, 베네수엘라 등의 대사관을 두루 근무하면서 전방위적인 외교 경험을 쌓았다. 특히 배로 월남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동행한 교민을 끝까지 챙기는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남 창원(75)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 주월남 대사관 서기관 ▲주멕시코 대사관 공사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주코스타리카 대사 ▲주러시아연방 공사 ▲주카자흐스탄 대사

저작권자(c)연합뉴스. 2011/09/26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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