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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3중국' APEC 가입 한국외교가 해냈다/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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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조회 3,097회 작성일2012-02-24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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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3중국\' APEC 가입 한국외교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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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외교부장 회견 스케치
14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기침중국외교부장의 기자회견장에는 국내외 보도진들이 몰려들어 한중관계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본사자료//1991.11.14(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中ㆍ대만 \'동시가입\' 첨예대립..8개월간 마라톤 비밀협상
이시영 前대사 회고..대만명칭 놓고 맨해튼 \'최후의 담판\'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정묘정 기자 = "쓰리 차이나(Three China) 가입 협상을 APEC 의장국인 한국의 SOM(고위관리회의) 의장에게 위임한다"
순간 의장석에 앉아있던 이시영 외무부 외교정책실장은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 속에서도 짜릿한 사명감을 느꼈다. 이것은 당시 아태지역의 국제사회가 한국외교 전체에 내린 \'특명\'이었다. 지금까지 \'짜여진 틀\' 속에서 부차적 역할만 해온 한국이 이제 다자외교의 전면에 나서 주도적으로 새로운 판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도전이자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90년 10월23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3차 아태경제협력체(APEC) 고위관리회의의 중화경제권 3자(중국ㆍ대만ㆍ홍콩) 가입 추진 위임은 이렇듯 엄청난 무게감으로 한국 외교에 다가왔다.

남은 기간은 1년 정도였다. 객관적 여건으로만 보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당시까지 다자외교 무대의 전면에 서본 적이 없는 \'초짜\' 한국이, 그것도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중국과 대만을 동시에 가입시키는 작업을 단기간에 조율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까지 중국과 대만이 동시에 가입한 국제기구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APEC 12개 회원국 중 11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있었고, 오직 한국만이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장애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던가. 3자 APEC 가입협상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떠맡은 이 실장은 "외교의 새 역사를 쓰겠다"는 사명의식과 아이디어 하나를 믿고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로 바꾸는 길고도 험한 여정에 들어섰다.

◆ 中ㆍ대만 팽팽한 대치..출발부터 난항 = 첫 수순은 \'셔틀외교\'였다. 협상 대상국인 중국, 대만, 홍콩을 돌아다니며 각국 정부의 입장을 타진해보는 게 급선무였다.

문제는 그때까지 우리 정부 고위당국자가 공식적으로 중국 본토(本土)에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었던 것. 아직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한국 외교관은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암중모색 끝에 홍콩 총영사관과 중국 신화사 채널을 활용해 중국 측에 방중 카드를 던졌다. 그러자 얼마 후 중국 정부는 "APEC 차기 의장 자격으로 방문하면 받아주겠다"고 답해왔다.
이 실장이 베이징(北京) 행 캐세이퍼시픽 항공에 몸을 실은 것은 1991년 2월. 베이징 수저우 공항에 도착한 이 실장은 중국측의 \'칙사 대접\'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추이텐카이(崔天凱) 국제기구과장이 직접 영접을 나왔고 VIP실을 거쳐 공항을 나오자 대기 중이던 외빈차 링컨 콘티넨털에 실려 곧바로 댜오위타이(釣魚臺)로 안내된 것이다.

이는 그만큼 APEC 가입을 중국이 내심 원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였다. 중국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 이후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이를 정치적으로 타개하고 개혁ㆍ개방 이후의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려면 하루빨리 아태지역 경제체제에 편입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관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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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연합뉴스) 이재혁 기자 = APEC회의에 참석차 내한한 전기침 중국외교부장(가운데)을 이시영 외무부정책실장이 영접하고 있다. 1991.11.12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침실이 운동장처럼 넓은 영빈관 댜오위타이의 어느 방에서 첫 협상이 시작됐다. 중국 다자외교의 핵심 엘리트인 친화순(秦華孫) 국제기구 국장이 협상대표로 나섰다. 중국의 입장은 예상대로였다.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을 존중하고, 대만과는 분명한 차별대우를 해달라는 요지다. 이는 중국은 주권 국가의 신분으로 가입하되 대만은 지역 경제주체로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화민국\'이라는 독립된 국가 자격으로 가입하겠다는 대만의 입장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실장의 목표는 당장의 협상성과를 내기보다는 중국과의 \'협상의 끈\'을 계속 이어가는 데 있었다. 바로 다음 달 한국에서 열리는 ESCAP(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총회 기간 친화순 국장이 서울에 와서 비밀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중국 측에 던졌다. 친 국장은 "검토해보겠다"고만 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날 이 실장이 출국하기에 앞서 공항까지 환송을 나와서 "좋다. 서울에 가서 계속 협상하자"고 수락했다.

서울 롯데호텔로 무대를 옮겨 ESCAP 총회의 막후에서 이어진 긴 2차 비밀협상도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다. 다만 중국 측은 가입 시점이나 자격에 있어 대만과 차등 대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대만을 정식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가입시키거나 중국을 먼저 가입시킨 뒤 시차를 두고 대만을 가입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실장의 초청에 따라 대만의 우즈단(吳子丹) 외교부 국제기구 국장도 방한했다. 따로 만난 우 국장의 입장은 중국의 요구와는 여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동등가입 이외에는 수용할 수 없으며 대만은 반드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가입시키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 실장은 "대만이 국제무대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며 신축성을 보일 것을 주문했다. 그때 우 국장은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처럼 미묘한 \'힌트\'를 주었다.

같은 해 5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3차 협상도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열릴 3차 APEC 각료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뿐이었다.

◆ "묘안을 찾아서"..Chinese Taipei 절충안 부상 = 1991년 6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던 협상에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대만과의 차등가입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중국이 한국의 집요한 설득 끝에 입장을 철회한 것이다. 4차 협상차 베이징을 찾은 이 실장이 "차등 가입은 APEC 각료회의에서 위임받은 지침에 위배되므로 고려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자 마침내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각료회의에서 이 지침이 재논의되려면 중국의 APEC 가입이 몇 년 더 늦어질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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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前 주유엔대사(자료 사진)

이제 남은 과제는 대만의 가입명칭과 APEC 각료회의 참석 대표단의 지위였다. 중국은 대만이 \'중화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대만 대표단도 중국과 동급(同級)으로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중국 측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한국이 이번에는 대만을 집요하게 설득하자 대만이 다소 유연한 태도를 내비친 것이다. 1971년 유엔의 의석을 중국에 빼앗긴 이래 대만의 20년간의 국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국제무대로 되돌아올 수 있는 모처럼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명분보다는 실리를 취하는 신축성을 보이라"고 거듭 주문한 것이 주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대만을 과연 어떻게 호칭할 것이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당초 중국 측이 \'중국 대만(Taiwan, China)\'을 요구했지만 대만은 이를 거부한 터였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 실장은 \'Chinese Taipei\'이라는 명칭을 떠올렸다. 과거 한 국제스포츠 대회에서 사용됐던 대만의 영문 명칭으로, 중국과 대만 양국의 입장을 절충할 가능성이 보이는 묘안이었다.

대만 대표단의 지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대만을 국가가 아닌 경제주체로 가입시키는 쪽으로 해법을 찾았다. APEC은 주권국가 간의 국제기구가 아니라 경제주체 간의 국제 협의체라는 점에서 국기나 국장 등의 표지를 걸지 않도록 한다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외교부 장관과 경제부 장관이 함께 참석하는 다른 회원국과는 달리 대만은 자발적으로 경제부 장관만이 각료회의에 참석토록 하는 방안을 대만 측에 제안했다.

그해 8월 서울에서 진행된 5차 협상에서 이 실장은 대만의 명칭과 대표 수준을 담은 타협안을 최후통첩으로 중국과 대만에 전달한 뒤 고위관리회의 개최일인 8월26일을 \'데드라인\'으로 통보했다. 양측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데드라인에 임박해서야 먼저 중국이, 그리고 마지막 날 대만이 타협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경주에서 제3차 APEC SOM 회의를 진행하던 이 실장에게는 참으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가 방금 전해 들은 \'낭보\'를 회의석상에서 발표하자 회원국 대표들로부터 무수한 찬사가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을 수행해냈다"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즉각 이상옥 외무장관 앞 친서를 통해 이 실장이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치하를 전해왔다.
당시 이 실장의 활약상은 3차 APEC 각료회의에 중국 측 수석대표로 참석했던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의 회고록에서 생생히 기록돼 있다. 첸 전 외교부장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이시영 차관보는 중국과 대만, 홍콩 세 지역을 오가며 말을 전하고 또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 방안을 제출했으니 그 고생은 가히 말을 안 해도 알 만한 정도였다"고 극찬했다.

◆ 다시 찾아온 고비..맨해튼 \'최후의 담판\' = 이제 남은 과제는 합의내용을 문서화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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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전기침 외교부장 면담
노태우 대통령은 12일 오후 청와대에서 중국의 각료급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전기침 외교부장을 면담했다./본사자료//1991.11.12(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1991년 유엔총회 기간 뉴욕 맨해튼에서 중국과 \'최후의 담판\'이 치러졌다. 양해각서(MOU) 문구를 막판 조율하기 위한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6차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비밀협상은 주유엔 중국대표부가 임대한 유엔본부 맞은편의 작은 아파트에서 진행됐다. 그해 9월30일 시작된 협상은 출발부터 녹록지 않았다. 핵심 쟁점은 구두로 합의된 내용의 문서화에 맞추어졌다. 중국은 대만이 APEC에 가입하되 각료회의는 주최하지 못하고 대만 외교부 인사는 대표단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합의 내용을 MOU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 측은 대만의 입장을 고려해 중국과 대만의 문서를 별개로 작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무려 사흘간에 걸쳐 숨 가쁜 \'마라톤협상\'이 이어졌다. 양국 대표단은 협상과 청훈(본국 정부에 훈령을 청함)을 반복한 끝에 10월2일 자정 가까이 마침내 극적인 타협안을 도출해냈다. 대만이 APEC 각료회의를 주최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외무부 장관의 별도 서한 형식으로, 대만 대표단의 구성 지침은 대만과 APEC이 따로 체결하는 MOU에 명시하기로 한 것이다.

맨해튼 비밀협상은 결과적으로 한중수교의 \'초석\'을 놓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치천 외교부장의 공식 면담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아직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두 나라 외교장관을 공식적으로 만나게 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 실장은 이상옥 장관이 3차 서울 APEC 각료회의의 의장 자격으로 중국 측 수석대표를 맡을 첸 외교부장을 만나도록 한 것이다.

양국 외교장관은 유엔 안보리 회의장에 딸린 작은 회의실에서 APEC 각료회의 의장과 회원국 수석대표 자격으로 마주 앉았다. 비록 양자관계에 대한 회담은 없었지만 외교사적으로 기념비적인 만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막판 돌발 상황..중국의 \'몽니\' = MOU 체결까지 마무리되자 한국 정부는 즉각 중국과 대만, 홍콩 외교부에 3차 APEC 각료회의 초청장을 발송했다. 회의 시작 전날인 1991년 11월12일, 드디어 중국 대표단이 특별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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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APEC 회의
제3차 APEC 회의에 참석중인 전기침 외교부장과 리란칭 대외경제무역부장./본사자료//1991.11.13(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한ㆍ중간에 어떠한 공식교류도 없었던 당시 중국 정부 각료가 서울의 한복판에 등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수교는 \'화룡점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외교가의 이목은 단연 중국 대표단에 집중됐다.

그러나 그날 저녁 예기치 못한 돌출상황이 발생했다. 중국 측이 돌연 노태우 대통령이 주관하는 환영 만찬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해온 것이었다. 진수지(金樹基) 당시 주한 대만대사가 만찬에 초청돼 참석한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 합의사항 위반이라고 \'몽니\'를 부린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가 의례적으로 APEC 각료회의 참석국들의 주한 외교사절에 초청창을 보낸 불찰에 따라 발생한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하나의 중국 입장을 견지해 온 중국으로서는 대만 총통을 대표하는 주한 대만대사가 대통령 환영 만찬에 참석하는 것은 APEC과 3자간의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만찬 후에는 노 대통령과 첸치천 외교부장간의 단독 회견까지 겨우 주선해 놓은 상황이어서 중국 대표단이 불참할 경우 이는 \'외교적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로서는 대만 측에게 \'사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 실장은 대만 대표단의 우즈단 국제기구국장을 설득하여 대만 측 수석대표인 경제장관을 통해 진 주한대사의 불참을 설득하도록 요청했고 결국 진 대사가 자진해서 불참하는 \'양보\'를 이끌어 냄으로써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자칫 APEC의 축제 분위기를 망칠 뿐만 아니라 이 실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련해 놓은 노대통령과 첸 중국 외교부장 간 단독 회견이 자칫 무산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우즈단 국장이 발벗고 나서준 데는 사유가 있다. 중국 측과는 대만 대표단에 외교부 인사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원칙적 합의를 본 후였다. 그러나 이 실장은 1년 가까이 협상을 함께해온 대만 측 협상대표인 우즈단 국장을 서울 각료회의에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사람들이 매우 중시하는 \'의리\'의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불가한 일이라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이 실장은 오직 의리의 관점에서 오 국장이 외교부 국제기구국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서울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중국의 친 협상대표에게 간곡히 요청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 중국측이 선례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 요청을 예외적으로 받아드리겠다고 응답해왔다. 우 국장은 이로써 이 실장에게 엄청난 신세를 진 셈이 됐고, 이 실장의 대만대사 청와대 만찬 불참 간청에 흔쾌히 나서서 발 벗고 뛰게 된 것이다.

그 후 중국은 다행히도 회의기간 내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첸 외교부장은 노 대통령과의 단독 회견 뒤 언론의 사진촬영을 허용해달라는 이 실장의 요청에 싱긋이 웃으며 "It\'s OK"라고 대답하는 등 임박한 한중 수교를 염두에 둔듯한 노련한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촬영된 노 대통령과 첸 부장의 회견장면은 다음날 모든 조간신문의 1면을 도배했다.

◆ "외교는 흥정..중국을 납득시켜라" = 중국ㆍ대만ㆍ홍콩의 APEC 가입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이 실장은 1992년 2월 주(駐)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했다.

부임 직전 중국 외교부의 공식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다시 찾은 이 대사에게 첸 외교부장은 단독회견을 통하여 "중국의 APEC 가입을 실현시킨 당신의 노력이 한중 수교를 많이 앞당길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한국 정부가 APEC 가입협상 과정에서 이 실장을 통해 보여준 중국에 대한 입장이 한중수교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92년 8월, 드디어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당시 협상은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외교를 질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기여한 큰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이 다자외교 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독자적인 \'협상 포뮬러\'를 창안, 이를 끝까지 관철시킨 최초의 사례였다. 복잡한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한국도 직접 판을 짜고 어젠다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계기였다.

또한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대중 외교에 주는 함의도 적지 않아 보인다. 서로 정책이 다르더라도 성급히 양보하거나 타협하기 전에 \'긴 호흡\'을 갖고 우리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본 국익의 논리를 끈질기게 설명해 납득시키면 중국은 그것을 일단 존중하는 바탕에서 협상에 임하는 융통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국에 잘 보여야 될 필요성만 생각하여 서로 밀고 당기며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끈질긴 흥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성급히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우리의 근간의 행태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이 대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같은 중형국가가 국제 외교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까지 \'원칙\'을 주장하고 상대편을 설득시키면서 상호 간 합의를 이끌어 내는 집요한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교는 서로 국익을 놓고 끈질기게 흥정하여 각각 win-win 해야 하는 것인데, 정부가 때로 국내 정치적 또는 사적 고려를 구실로 제대로 흥정을 못하거나 안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 대사의 지적은 때로 좌표를 상실하는 듯한 우리의 대중 외교를 향한 뼈아픈 일침이다.

◇ 이시영 전 주유엔 대사 = 외유내강형으로 꼼꼼한 일 처리에다 기지 넘치는 협상수완까지 갖춘 전형적 다자외교 전문가다.
1961년 외무부에 첫발을 들인 후 주(駐)유엔 참사관과 주유엔공사, 주빈 국제기구대표부 대사에 이어 1998년 제17대 유엔 대사를 역임했다. 주유엔대표부에는 서기관에서 시작하여 4차례에 걸쳐 13년 동안 근무했다.

1991년 제3회 APEC 서울 각료회의 당시 사무총장직으로서 탁월한 기획 능력을 선보였고 외교적 난제였던 3중국 동시가입 협상을 원만히 타결지었다.

주오스트리아 대사 시절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국으로서의 활약을 통해 제1차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했고 1996∼1997년 주불 대사로서 OECD 가입을 실현시켰다. 남ㆍ북ㆍ미ㆍ중 4자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퇴임 후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와 전주대학교 총장, 한동대 석좌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외교분야 후학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74) ▲서울대 정치학과 ▲국제연합과장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국제기구국장 ▲주유엔 공사 겸 주미 공사 ▲외교정책기획실장 ▲서울APEC각료회의 사무총장 ▲주오스트리아 대사 겸 주빈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외무부 차관 ▲주프랑스 대사 ▲주유엔 대사

저작권자(c)연합뉴스. 2011/10/10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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